1999-01-21, 『한겨레21』

 

불온한 세상, 삐딱한 외침


이상수 기자 / 한겨레 문화부


주류 학문 질서에 맞서는 지식 게릴라들… 그들이 새로운 미학적 영역을 개척한다



(사진/ 왼쪽부터 김현, 변정수, 서동진, 손동수, 손혁재씨(위), 왼쪽부터 안이영노, 원재길, 이성욱, 전진삼, 조형준씨(아래))

 

‘식자우환’이란 말은 본디 “아는 게 우환”이란 말이다. 지식인으로 살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사자성어가 “먹물 먹은 자들이 바로 우환덩어리”란 말로 들리게 된 지 오래다. 이른바 ‘식자’들이 모여 있는 대학 사회를 잠시만 들여다봐도 이들이 왜 우환덩어리 취급을 당하는지 금세 알 수 있다. 한국에서 대학은 학연과 지연이 가장 강력한 끈으로 작용하는 ‘최악의 거대 조직’이다.

  

재벌기업이 많은 욕을 먹지만, 그래도 그 조직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 가장 뛰어난 인재를 뽑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동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쟁력이 떨어져 도태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은 전혀 그런 개념이 없다. 가령 새로 교수를 채용할 때, 후보자가 어느 학교 출신인가가 거의 절체절명의 조건으로 작용한다. 한국의 대학을 엿볼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음의 비판에 공감할 것이다.

  

“정당말고 대학처럼 정치가 판치는 영역이 또 어디 있으며, 경로당 장기말고 대학의 변화처럼 느려터진 현상이 또 어디에 있으며, 군대말고 대학처럼 ‘하극상’에 대해 비분강개하는 집단이 또 어디에 있는가.”

  

  

명함 없이도 풍요로운 지적 작업

  

계간 <현대사상>(주간 김성기 전주 한일대 교수·39) 7호의 단행본 ‘특별 증간호’ <한국의 지식 게릴라>에 실린 자유기고가 조병준(39)씨의 말이다. <…게릴라>는 이 잡지가 지난 여름호부터 특별 증간호 형식으로 펴내온 세권의 ‘지식인 리포트’ 완결편에 해당한다. 첫호에서는 주로 대학 교수들을 등장시켜 한국 대학이 안고 있는 문제를 부각시켰고, 두번째호에서는 <한국 좌파의 목소리>란 제목 아래 이른바 진보진영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 두권의 리포트가 주로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았다면, 이번호에는 대학 밖에서 활동해온 열두명의 육성을 담았다. 이들 대부분은 교수가 아닌 것은 물론, 번듯한 명함 한장 없으면서, 제도권 주변에서 나름의 근거 마련을 위해 고군분투해온 지식인들이다. 이름하여 ‘지식 게릴라’.

  

이들이 고민하는 주제는 우선 기성 지식인의 관념으로는 결코 연구 대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주로 영화 대중음악 문화비평 등 대중문화 주변에 포진해 있는 주제들이지만, ‘동성애 인권운동’과 같은 낯선 주제들도 다룬다. 이들의 목소리는 기존 시각에서 볼 때 한결같이 뭔가 삐딱하고 반항적이고 불온하며 때론 경박스럽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게릴라’라는 이름값을 해온 셈이다.

  

우선 권두좌담 ‘또다른 지식인 문화를 찾아서- 삐딱이 정신에서 틈새주의까지’에는 문화비평가 이성욱(39)씨, 번역기획자 조형준(35)씨, 대중가수 안이영노(33)씨 등 세명이 참가했다. 자유기고가 조병준(39)씨, 월간 <인물과사상> 편집장 변정수(35)씨,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 유학중인 진중권(36)씨, ‘게이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서동진(32) 성공회대 강사, 문화비평가 손동수(32)씨, 시인 원재길(40)씨, 전진삼(39) 월간 <건축인 POAR> 편집인, 손혁재(45)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김현(40) 한국학데이터베이스연구소 소장 등 아홉명은 지금까지 자신의 지적 작업과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을 담은 글을 한편씩 썼다.

  

‘자기 잘난 맛에 산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개성이 강한 게릴라들의 글을 한데 모은 까닭에 이들이 내는 목소리는 우선 불협화음으로 들린다. 그러나 불협화음이 어떤 경우엔 새로운 미학적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

  

우선 이들의 불협화음에 일관해 흐르고 있는 정서는 제도 형식 조직 질서 억압 틀 따위에 대한 생래적 혐오와 조소와 거부이다. “조직과 모험은 천적이며 조직과 실험은 상극”(조병준)이라고 단언하는가 하면,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 가족주의를 비판하며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변정수)고 외치기도 한다.

  

  

열림을 향한 문화의 자양분 제공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는 것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오호라, 내가 지식인!”이냐고 야유하기도 하고, “그래, 나는 ‘놀새’(북한말로 ‘플레이보이’란 뜻)다!”(진중권)라고 자인하기도 한다. ‘먹물 근성’이라는 말이 수식어로 붙어다니는 기성 지식인들과의 동일시를 부대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존의 고급한 지식영역 연구에 안주하기보다 ‘대중문화’라는 새로운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이성욱씨는 80년대엔 정치적 급진주의가 일정한 노릇을 했지만, 90년대에는 정치와 문화의 분열 양상이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문화’가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구실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억압적인 기존 질서를 깬 뒤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하베르마스의 말을 빌려 근대를 여전히 ‘미완의 기획’이라고 말하는 진중권씨는 극좌와 극우가 나름의 필요에서 받아들인 포스트모던을 비판하고 근대의 합리적 이성을 세우는 작업이 자신의 과제라고 밝힌다.

  

한국학 자료의 전산화에 힘써온 김현씨는 ‘정보화 시대에 여전히 옛것을 돌아보는 이유’라는 글에서, 전통적 가치의 부정적 면모에 대한 비판도 필요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성취 중 많은 부분이 전통적 가치의 토대 위에서 이룩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러 선정주의 경향이 눈에 거슬리지만, 이들의 글쓰기가 한국 사회의 ‘열림’을 향한 채찍과 소금 노릇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점은 누구도 쉽게 부정하기 어렵다.